에세이취미는 취미일때 아름다운거지 20250823
“수하야 돈잡아라 돈!”, “아니 공부 잘하게 연필잡아라!” 이것이 나의 돌잔치 때 풍경일 것이다. 이제 막 한살이 된 어린아이의 운명을 물건에게 맡기는 모습이라니. 나는 물론 어른들의 성화에 못이겨 첫째딸, 첫손녀, 첫조카답게 연필을 의젓하게 잡아 쥐었고, 그때부터 모든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열심히 그리고 곧잘 반1등, 전교1등을 하며 공부잘하는 아이 타이틀을 땄다. 근데 그때까지 모두들 몰랐을 것이다. 내가 쥐었던 연필이 공부연필이 아닌 그림연필인 4B인것을.

 나의 부모님은 나름의 갖고있던 육아철학때문인지 뭔지 모르는 것 때문에 장난감 코너는 아이쇼핑만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착한 맏딸이었기에 장난감을 사달라는 떼를 쓰는 법을 몰랐고, 그저 집에 돌아와서 아까 마트에서 보았던 것들을 그리고 만들었다. 하루는 당시 어느정도 산다는 초등학생 집에 가면 볼 수 있는 미국산 포켓사이즈의 인형집 폴리하우스가 너무 탐나서 친구집에서 돌아오자마자 밤을 새며 인형의 집을 그리고 만든 적이있었다. 그뿐이겠는가, 친구들과 시장놀이를 하고싶어 종이박스로 마트에 있는 물건들을 구현해보기도하고, 생일파티를 하면 친구들에게 와줘서 고맙다는 감사카드와 고깔모자를 손수 만들기도 했다. 나에게 그리고 만드는 미술이란 자급자족놀이를 위한 생활이었다. 

 그때까지 놀랍게도 미술학원은 한번도 다니지 않았다. 동생이 나오는 막달, 배부른 엄마의 손을 붙잡고 외갓집근처에 있는 미술학원을 다닌게 전부였다. 그때 처음으로 쭈그리고 앉은 접힌 팔과 다리를 그리는 방법을 배운 것은 나의 7세 인생에 있어서 꽤나 충격적인 배움이었다. 그리고 나는 갑작스럽게 예술고등학교 준비를 위해 미술학원을 입시 세달전에 다니게된다. 내신등급제라는 달라진 입시시스템으로 인해 좋은 대학을 가길 바랬던 부모님은 공부잘하는 학교에서 꼴찌가아닌, 성적이 안좋은 지방예술고등학교에서 1등을 하길 바라며 지원서를 들이밀었다. 그전까지 세일러문이나 따라그릴 줄 알던 단발머리 중학생은 급작스레 4B연필을 길쭉하게 깎는 법을 배우고 명암을 넣어 아그립파 석고상을 그리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나의 대학입시시절부터 대학생이 되어 숙취에 시달리는 날이 아니고서야 하루도 쉬지않고 그림을 매일 쭉 그렸다. 하루의 반나절 내내 그림그린적도 날밤을 샌적도 잦았다. 어깨가 찢어질거같고 목과 허리가 뜯어나갈 것 같아도 이 모든게 심장을 두근거리게했다. 내가 무언가에 열중해서 창조해낸다는 것, 내가 머릿속에 감춰두었던 이미지나 이야기들을 나의 바깥으로 꺼내는 것 모두 큰 재미였다. 엄마도 아빠도 친척들도 학교선생님이 되라는 성화에 맞서 싸우며, 더이상 착한아이 콤플렉스에 지배당하지 않겠다며 예술가라는 직업을 택했다. 그러니까 나의 취미생활은 이제 돈벌이 수단이 되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인생이 고통이다라고 느꼈던 것은. 나는 항상 부족한 지갑사정에 시달려야했다. 그리고 원래 해왔던 예술분야를 등지고 돈을 벌러 떠나는 친구들이 점점 늘며 외로움도 커졌다. 다들 하나둘씩 직함이 생기고 계좌에 차곡차곡 돈이쌓이면서 차를 사녜, 집을 사녜, 결혼을 하녜 할 적에도 나는 엄마아빠집에서 기생하며 살고 있었다. 아침에는 파주갔다가 저녁에는 인천을 왔다갔다하며 미술강사로서 디자이너로서 또는 아티스트로서 살았다. 할 줄 아는 것은 많아지고 나를 칭하는 이름도 여럿인데 명절마다 나는 한없이 작아지는, 아직도 돈에 허덕이는 철없는 백수딸이었다. 나는 그럼에도 아직 예술을 사랑했고 예술가란 이름으로 살고싶었기에 더 많은 기회를 찾아보겠다고 예술의 나라 프랑스라는 연고없는 낯선 땅으로 향했다. 

 환경이 바뀌면 더 많은 창조적 영감과 창작할 기회를 줄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어리석었다. 그렇지만 그동안 이곳저곳 부딪히며 겪어온 나는 아주 어리지도않고, 알거는 다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프랑스는 적당히 젊고 적당히 아는 나에게 호락호락 하지않았다. 청년할인에는 한두살 차이로 해당이 안되었으며, 적당한 영어실력과 지식들은 나를 콧대높은 폐쇄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 프랑스라는 언어의 장벽은 어마무시하게 높았고, 외국인이라는 신분은 큰 걸림돌이었으며, 비자 문제는 항상 따라 다녔다. 한국에서 꽤나 잘통했던 내 이력서는 더이상 외국의 땅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모든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했었다. 나는 계란한알 값에 손을 떨수밖에없는 더한 가난을 맛봐야했고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 하나도 없는 곳에서 더한 외로움에 맞닥트려야했다. 생존이 1순위가 된 이상 예술은 사치였다. 문화와 예술의 도시 파리에 있는 10개월동안 그 유명한 루브르도 퐁피두도 가지못했다. 그림 한장 그릴 체력으로 1€라도 더 벌어와야했다. 하지만 패배자라는 낙인이 찍힐것이 두려워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않았다. 

 올해로 프랑스에 산지 햇수로 칠년이다. 프랑스는 이제 익숙한 곳이고 나의 삶의 터전이다. 한국욕보다는 프랑스 욕이 입에 찰떡으로 붙고, 꿈도 프랑스어로 꾼다. 그럼에도불고하고, 나는 그림을 안그리고있다. 즉각적으로 돈으로 환산 되지 않는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예술은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럴수록 모순적이지만 예술에 대한 갈망이 커진다. 나이 듦에따라 확고해지는 취향과 높아지는 눈에 반비례한 내 답답한 종이 위의 손은 예술을 더 신성하고도 어려운 영역으로 만든다. 작업을 하고싶은 욕구가 점점 커갈수록 흰캔버스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 나는 신병난 무당처럼 앓고만 있다. 그러나 작두탈 용기는 없는 쫄보 무당이다. 나는 오늘도 왜 프랑스에 왔더라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본다.